전산시스템·메뉴얼도 지휘·명령 수단이 될 수 있는가-김진우 변호사
등록일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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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시스템·메뉴얼도 지휘·명령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대상판결 : 대법원 2025. 6. 12. 선고 2022다166 판결]
근로자파견에 관한 기본 법리
실무에서는 원청이 파견법의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계약의 형식은 도급으로 하면서 실질은 파견인, 이른바 ‘위장도급’을 활용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이 경우 근로자는 파견법상 보호(직접고용의무 등)를 받지 못하게 되므로, 해당 관계가 파견인지 도급인지를 실질적으로 구별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법’) 제2조 제1호는, 근로자파견을 “파견사업주가 근로자를 고용한 후 그 고용관계를 유지하면서 근로자파견계약의 내용에 따라 사용사업주의 지휘·명령을 받아 사용사업주를 위한 근로에 종사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파견과 도급의 핵심적 차이는 바로 지휘·명령 주체가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도급에서는 수급인(협력업체)이 독자적인 지휘·감독 아래 근로자를 사용하여 일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데 비하여, 파견에서는 사용사업주(원청)가 파견근로자에 대한 실질적인 지휘·명령을 행사합니다.
대법원은 2015. 2. 26. 선고 2010다106436 판결 등을 통하여 근로자파견관계 판단 기준을 다음 5가지로 정립하였습니다.
근로자파견에 해당하는지는 당사자가 붙인 계약의 명칭이나 형식에 구애될 것이 아니라, ① 원청기업이 당해 근로자에 대하여직·간접적으로 그 업무수행 자체에 관한 구속력 있는 지시를 하는 등 상당한 지휘·명령을 하는지, ② 당해 근로자가 원청기업 소속 근로자와 하나의 작업집단으로 구성되어 직접 공동 작업을 하는 등 원청기업의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③ 협력업체가 작업에 투입될 근로자의 선발이나 근로자의 수, 교육 및 훈련, 작업·휴게시간, 휴가, 근무태도 점검 등에 관한 결정 권한을 독자적으로 행사하는지, ④ 도급계약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범위가 한정된 업무의 이행으로 확정되고 당해 근로자가 맡은 업무가 원청기업 소속 근로자의 업무와 구별되며 그러한 업무에 전문성·기술성이 있는지 ⑤ 협력업체가 계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독립적 기업조직이나 설비를 갖추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전통적인 제조업 현장에서 지휘·명령은 관리자가 작업 현장에서 구두로, 또는 작업지시서를 통해 직접 지시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디지털화가 고도화됨에 따라 원청은 전산시스템, 앱, 매뉴얼 등을 활용하여 근로자와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서도 사실상의 업무지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디지털 매개 지시가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지휘·명령’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근로자파견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대상판결의 요지
삼성전자서비스는 1998년 삼성전자 자회사로 설립된 이후, 삼성전자 제품의 수리·유지보수 업무 전반을 사내 협력업체 소속 수리기사들에게 맡겨왔습니다.
수리기사들은 전산시스템을 통해 ‘사전 환경설정 → 고객요청 → 고객응대(수리) → 검수 및 수수료 지급’의 형태로 작업하였고, 전산시스템에는 수리기사들의 활동지역, 출근 여부, 업무 가능 시간 등이 입력되었습니다. 수리 제품, 수리 소요 시간 등이 관리되었고, A~D 등급으로 나뉜 수리 능력도 평가받았습니다.
서비스센터 내근기사의 경우, 협력업체 직원이 고객의 상담·접수를 한 다음 고객·제품 정보를 전산에 입력하면 수리를 배정받아 수리하는 방식으로 일하였고, 외근기사의 경우 고객이 홈페이지나 콜센터로 수리를 요청하면 접수 뒤 일정을 조율해 방문 수리하는 방식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들 수리기사 1,335명은 2013년 7월 근로자파견관계를 주장하며 삼성전자서비스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고용노동부는 2013년 9월 삼성전자서비스와 협력업체 사이의 서비스업무계약이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으로 보기 어렵다는 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협력업체가 자기자본으로 회사를 설립해 자체적으로 노동자를 채용하고 취업규칙을 운영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1심 법원 역시 근로자파견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소심은 협력업체에 고용된 서비스기사들이 삼성전자서비스 사업의 핵심 업무인 삼성전자 제품의 수리·유지보수 업무에 관하여 삼성전자서비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지휘·명령을 받으면서 삼성전자서비스를 위한 근로에 종사하였다고 판단하여 1심을 뒤집었습니다.
대법원과 항소심은 위 대법원의 5가지 기준을 종합 적용하면서, 특히 ‘지휘·명령의 상당성’ 요소를 판단함에 있어 전산시스템과 매뉴얼을 원청의 지휘·명령 수단으로 명시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① 지휘·명령의 상당성 — 전산시스템과 매뉴얼을 통한 직접 통제
항소심은 원청이 설계·운영하는 전산시스템을 통해 협력업체 소속 근로자 개인에게 직접 업무가 배정되고, 수리기법 참고에서 작업 결과 입력까지 업무의 전 과정이 그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 이는 원청이 협력업체 소속 서비스기사들에게 직접 업무를 부여하고 지휘·감독하였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징표라고 명시하였습니다.
특히 전산시스템에 관한 협력업체 사장의 역할이 서비스기사들의 기본정보 입력과 결근·업무 과다 등 예외적 상황에서의 변경에 한정되었고, 협력업체가 자체적인 작업계획서나 작업지시서를 보유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수리 업무 노하우에 따른 수리 계획도 수립하지 않았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하였습니다. 이는 협력업체 사장이 실질적 지휘·감독자가 아니라 전산시스템 운영의 보조자에 불과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매뉴얼과 관련하여서도, 삼성전자서비스가 ‘서비스 핸드북’, ‘친절서비스매뉴얼 MOT’ 등을 통해 구체적인 수리 방법뿐만 아니라 고객 방문·응대 방식까지 정하였고, 협력업체 소속 서비스기사들은 이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 과정에 협력업체 사장이 관여하였다고 볼 만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원청이 제공하는 전산시스템에 의해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는 업무의 특성상, 협력업체 사장의 개별적이고 직접적인 지휘나 작업지시가 필요하지도 않은 구조였습니다. 법원은 이처럼 매뉴얼이 근로자의 노무 제공 방식 자체를 규율하는 경우에는 이를 원청의 지휘·명령 수단으로 평가되었습니다.
② 사업에의 실질적 편입
협력업체 소속 서비스기사들이 삼성전자서비스 사업 목적인 삼성전자 제품 수리의 약 98% 물량을 수행하였으므로, 삼성전자서비스가 자신의 근로자들이 맡은 업무와 구별되고 별도의 전문성·기술성이 필요한 일부 업무를 분리해 협력업체에 도급·위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원청의 핵심 사업에 실질적으로 편입되었다고 판단되었습니다.
③ 협력업체의 인사권 독자성
협력업체 대표자는 삼성전자서비스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정해진 월급을 받았고, 이는 협력업체의 수익과 무관하게 고정적으로 지급되었습니다. 이는 협력업체 대표자가 사실상 삼성전자서비스의 현장 관리자와 같은 지위에 있었음을 의미하며, 협력업체의 인사권 독자성이 형식에 불과하였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정으로 판단되었습니다.
④ 도급 업무의 구별성·전문성
협력업체 소속 서비스기사들의 업무는 삼성전자 제품의 수리·유지보수로서 전문성·기술성이 필요한 것이지만, 협력업체 소속 서비스기사들의 업무가 삼성전자서비스 소속 서비스기사들의 업무와 본질적으로 구분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되었습니다.
⑤ 협력업체의 사업독립성
협력업체는 자기자본으로 설립되어 독자적으로 취업규칙을 운영하는 형식을 갖추었으나, 영업 기반의 전부를 삼성전자서비스와의 계약에 의존하고, 대표자의 보수조차 원청 가이드라인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실질적 사업독립성이 없다고 판단되었습니다.
시사점
본 판결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전산시스템과 매뉴얼이 원청의 지휘·명령 수단으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입니다. 기존 판례는 관리자의 현장 입회, 구체적 작업 지시, 작업 결과 직접 검수 등 비교적 가시적인 행위를 중심으로 지휘·명령을 인정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본 판결은, 원청이 전산 플랫폼을 설계하고 그 플랫폼을 통하여 업무 배정·일정 조율·역량 평가·업무 흐름 전체를 통제하는 경우, 이를 지휘·명령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평가하였습니다. 이는 현대 산업 구조의 변화를 반영한 것으로, 원청이 외관상 도급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전산 시스템을 통해 하청 근로자를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파견법의 규율 대상이 됨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또한 본 판결은 공장 등 하나의 작업공간에 모여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아니라, 스마트기기 등을 통해 자동화된 매뉴얼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근무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도 파견법에 따른 파견근로자로서 원청 회사에 대한 직접고용을 요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습니다.
더 나아가 본 판결은 협력업체의 형식적 요건(자기자본, 취업규칙 보유, 독자 채용)이 갖추어져 있더라도, 협력업체 대표자 보수의 원청 결정, 영업 기반의 원청 의존, 업무 물량의 원청 배타적 수행 등 실질적 종속 관계가 인정되는 경우 사업독립성을 부정하고 파견관계를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형식적 요건만으로 적법 도급을 주장하는 기업의 방어 논리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원청 기업은 협력업체와의 도급 구조를 운영함에 있어, ① 전산시스템을 통한 개별 작업 배정 방식의 점검, ② 협력업체 자체 관리자에 의한 실질적 업무 배분 여부 확인, ③ 매뉴얼의 수준이 표준화된 품질 기준인지 구체적 작업 지시인지 구별, ④ 협력업체 대표의 보수 결정 방식이 독립성을 갖추고 있는지 검토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하여야 합니다. 반대로 불법파견 피해 근로자 측에서는 이 판결이 전산시스템과 매뉴얼을 중심으로 한 지휘·명령 입증의 유력한 논거를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